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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저것

요네하라 마리 < 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 옛 이야기에 숨은 교훈 >

계모에게 구박받는 의붓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 어느 나라의 옛이야기에나 있다. 어떤 식으로구박받는가, 페로의 <신데렐라> 미하일 일리인의 < 숲은 살아 있다>만 봐도 심술궂은 계모가 주인공을 혹독하게 부려먹는 한편, 제 피가 섞인 딸들이게는 집안일을 일절 시키지 않고 마치 공주님처럼 응석받이로 키운다. 백설공주도 결국 제 집인 성에서 살지 못하고 난쟁이들 집에서 살기 때문에, 모든 집안일을 떠맡게 된다.
 인류는 참으로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왔다. 예컨대 인류가 연구하고 발명한 족적을 더듬어보면, 어떻게 중노동을 줄일 것인가 하는 데 고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예이야기에는 그러한 가치관이 흘러넘친다.
 내리 일만 하는 신데렐라는 불행의 구럴텅이에 빠진 것이고, 본래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인 백설공주가 일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사태라는 설정이 그 증거다. 이야기의 결말은 왕자에게 발견되고 나서야 비로소 공주(일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가 된다,혹은 그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해피엔드라는 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재의 일본에서도 여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자식에게 가업을 고사하고 가사를 거들게 하는 것도 마음 아프다고 여기는 부모가 꽤 있다.그저 놀고 공부하는, 요컨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해주는 것이 부모 된 이의 '사랑의 증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옛이야기에는 다른 메시지도 들어 있다. 일하지 않고 응석받이로 자란 계모의 친딸들은 제멋대로이고 바보인 데다 정 없고 심술궂고 오만한 데 비해, 일하면서 자란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숲은 살아 있다>의 의붓딸은 상냥하고 슬기로워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
 이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인류가 예부터 간파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에 현명한 어머니라면, 전통적으로 의붓자식을 괴롭히던 방법을 반대로 할 것이다. 자기가 낳은 딸들은 호되게 일을 시키고 엉덩이를 때려가며 집안일과 학문을 몸에 익히게 하는 한편, 의붓자식은 손님을 대하듯 청소며 빨래 같은 것을 다 해준다. 물론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사준다. 그러면 그 아이는 누누게에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청맹과니 에고이스트로 자라는 것이다.


< 진화화 퇴화는 세트로 > 중
에스토니아(동유럽의 발트해 연안 끝에 있는 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추드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다. 여기엔 크고 작은 무수한 섬이 있는데, 그중 한 곳에서 1970년에 재미있는 실험이 행해졌다. 엄청난 수의 원숭이 무리를 풀어놓은 것이다. 아프리카 태생의 야생 원숭이가 있는가 하면 동물원에서 자란 원숭이도 있었다. 종류도 침팬지부터 오랑우탄까지 실로 다양했다. 공통점은 어느 원숭이든 러시아 북부의 자연 환경에서 살기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지역의 식물이나 동물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나무 열매나 버섯, 벌레나 작은 동물 등 종류도 풍부한데, 독성이 강한 것은 7-80종이 있고, 또 독성은 없지만 먹을 수 없는 것은 7-800종에 이른다.
 그런데 태생도 자란 환경도, 혈통도 다른 원숭이들 중 단 한마리도 유독한, 혹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은 버섯이나 나무 열매, 곤충이나 작은 동물에 입을 대는 놈이 없었다. 원숭이들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독이 없고 영양분이 높은 것을 골라내어 먹었다.

< 꽃은 반드시 피고 진다 > 중
 꽃은 식물의 삶의 정점이고, 바로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꽃 쥐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뒤에 남는 것은 이어서 새로운 꽃을 피울지도 모르는 씨앗뿐이다. 꽃은 시들고 줄기는 마르며, 잎은 누렇게 지고 뿌리는 땅속에서 다 썩는다.
 죽음은 삶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하지만 죽음이야말로 삶의 완결이다. 죽음으로 일단락되는 그것이 바로 삶이다.
 예부터 사람은 신(운명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에게 부여받은 생명에 감사하면서도, 똑같은 신에게서 받은 죽음은 저주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늦든 이르든 언젠가 꽃봉오리가 열리고 꽃이 피는 순간이 찾아온다. 반대로 죽음이란 삶의 전체상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고, 삶의 참된 의미를 깨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 것이다. 삶의 무의미를 가장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결국 꽃은 다른 무엇보다 새로운 씨앗을 낳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꽃의 아름다움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가루받이를 하지 않은 꽃 또한 씨앗조차 남기지 못한 채 마르고 썩어갈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을 보내는 습관은 사랑만이 삶을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하고 삶의 완성에 앞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더해주는 점을 상기시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화려한 꽃다발에서 죽음의 기색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홀로 되었을 때, 꽃다발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허공으로서의 죽음, 혹은 영원성으로서의 죽음을 말이다. 그리고 삶의 가능성이 다 발현된 아름다움으로서의 죽음을.

< 가장 좋은 교사 >
 지금도 개발도상국에서는 어린이를 중요한 노동력으로 생각하고 가족이나 사회도 의당 그러려니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률이 도입된 것은 20세기 후반이 되고 나서고, 그것도 선진국에 국한된 이야기다. 그 이전에는 아주 먼 옛날부터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어린이들은 어른들과 나란히 일하는 것을 아주 당연히 여겼다. 따라서 꼭 같은 비율로 아주 먼 옛날부터 근면한 아이와 게으른 아이가 있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왜 똑같은 조건에 놓여 있으면서 인간은 근면한 성격과 게으른 성격으로 갈라지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젊은이를 교육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아주 진지하게 고찰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에 의해 근면한 젊은이를 기르는 방법을 탐구하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근대 프랑스 철학자들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학설과 이론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그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프랑스에서 첫손 꼽히는 사보이아 지방 사람들의 근면함은 기후와 풍토의 혹독함, 생활 조건의 어려움이 가져다준 것이라고 보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결핍과 필요성, 요컨대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야말로 인간을 부지런히 노력하게 만들고 머리와 육체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게 하는 가장 좋은 교사라는 말이 아닐까?
 삼중고를 겪은 헬렌 켈러, 알바니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마더 테레사, 열등생으로 학교를 중퇴한 에디슨,....위인들의 전기를 떠올리면, 참으로 앞에서 말한 진실을 뒷받침하는 듯한,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어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표본으로 가득하다. 부족함이야말로 그것을 채우려 하는 활력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진리에 대해서는 위대한 학자가 뭐라 하기 후러씬 전에 예부터 세간에서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 증거로 민중의 지혜가 맺은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속담에서, "필요는 발명으 어머니다"라고 일깨워주고 있다.
 다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루소는 반어법을 써서 이것을 훨씬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아이를 망치는 법은 간단하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몽땅 사주면 된다."
 어쩐지 물건이 차고 넘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 이야기인 것 같아서 씁쓸하기는 하지만.

 

요네하라 마리 < 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