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지하철에서 생긴 일

 

 

 

 

 

지하철을 이용했던 사람이면 누구나

지하철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나도 -오래돼서 디테일한 부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무척 안타깝지만 -그래도 잊혀지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한 가지 에피소드를 써 보려 한다.

 

예전에 서울서 인천으로 이사한 후로도 교회는 광명으로 오랜동안 다녔던 나는

집에 오는 길은 거의 지하철을 이용했었다.

일요일밤 9시 넘어서의 1호선은 적당히 붐비기도 하고 때로는 한 두 자리씩 앉을 여유가 있기도 하고 그러했다,

 

그날은 대부분 자리가 차 있었고 몇몇이 서 있었는데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마 그 앞에 서있던 사람은 좀 연세 들어 보이는 중노인분이었는데 얼마 안 있어 내릴 참이라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앉지도 않으면서 그 앞에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앉지는 못하고 있고, 그 사람이 내려서 자리가 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근데 다음 역에서 어떤 아가씨가  언제 탔는지 그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껴가면서 그 자리에 쏘~옥 앉는 것이었다.

 

음....사람 생김새를 가지고 뭐라 하면 안되지만, 그 아가씨는 우리의 정겨운 닥종이 인형을 꼭 닮아 있었다.

 참고로, 닥종이 인형 사진을 올리보면 이런 모양이다.

 

 

 

위 사진의 닥종이 인형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쪽에 가깝지만 

그 아가씨는 왜그런지 주는 것 없이 얄밉게 생긴 닥종이 인형이랄까...

눈도 올라가서 심술궂게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건 참 미안한 일이지만, 왠지 행동이 얄미운 데가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탔는데 옆에 사람 아랑곳 않고 시끄럽게 통화하는 모습이나, 빈 자리에 그렇게 타는 모양새가 희한하게도 그런 얄미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데 그런 감정을 느낀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던지,

그 앞에 탔던 그 중노인 - 할아버지(?)의 행동이 볼만했다.

그 할아버지는, 아니나 다를까 다음 역에서 내릴 채비를 하셨다.

그런데 선반 위에 올려 놓았던 가방을 내린다는 것이,

긴 가방 끈을 잡아 당기는 바람에 가방 몸체가 그만 그 선반 밑에 있던 그 아가씨 머리로 툭 떨어져 버렸다.

 

음...내가 보기엔 아마도 그 할아버지가 그 아가씨 머리까지의 거리를 가늠해서 조준을 한 것이었다.

틀림없었다.

분명 그 위치까지 가방을 끌어 당긴 다음 끈을 잡아당겨 내렸으니까....

그러고는 준비한 대사 톤으로 "미안합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그 나가는 뒷모습에 대고 그 아가씨(이후로 닥종이녀라 칭하겠다)는

전화기를 잠시 내려놓고 재수 없다는 등의 욕 비슷한 말로 뒤돌아서 가는 그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는

 - 이 대목에서, 일부러 얄미운 마음에 가방을 떨어뜨렸을 거라는 심증이 확신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출입문 바깥에 서서 출입문이 닫힐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정말로 최선을 다해 욕바가지를 퍼부었다.

" 미안하다고 했잖아, 니 에미애비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이년아" 이렇게 시작해서 "어쩌구 저쩌구 이년아, 이 버릇없는 어쩌구 이년아, 니가 이ㄴ..""덜컹"

이렇게 문이 닫히기까지 노란선 밖에서 얼굴은 전철 안쪽으로 디밀고는 무슨 대본을 외우고 온 마냥 폭풍같은 욕드립을 마음껏 날리고 가셨다.

 

이 흥미 진진한 상황에서 그 주변 사람 대부분은 이제부터 그 닥종이녀의 반응에 관심이 가게 되는게 당연하다.

다들 주목하고 있는 스테이지에 그 닥종이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욕스킬을 맘껏 선보였다.

재수가 없으려니..어쩌구...뭐라뭐라..

(이 글을 옮기는 고상우아한 나는 그 욕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 안타까워라.)

그러면서 그녀는 통화하는 상대방에게 자초지종을 한참 설명하고 화풀이를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만 꺼낸 것이 헐~또 다른 핸드폰이었다.

왜 핸드폰을 두 개나 가지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마도 누굴 만나러 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암튼 그녀는 또 재수가 없으려니 어쩌구 하며 그때까지의 일을 상대에게 충실히 고해 바치고 있었다.

근데 그 앞에 계속 서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마디를 날리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독백에 가까운 말이었다.

"니가 더 재수없어, 이.년.아..."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핸드폰에 대고 쉴 새 없이 얘기하던 닥종이녀는 소머즈 귀를 장착하고 있었던 건지, 그 혼잣말을 잘도 포착해냈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그 아저씨를 향해 " 뭐라구요? 아저씨 뭐라 하셨어요?" 이렇게 싸움의 포문을 텄다.

아마도 닥종이녀가 통화에 몰입하고 있어서 들을 거란 생각을 안하고, 새어나오는 말을 입밖으로 꺼냈다가 졸지에 싸움의 상대가 된 아저씨는 당황했겠지만 나름 기선 제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니가 싸가지 없게 했잖아 이년아.." 등등으로 시작해서 둘이 서로 욕배틀을 했던 것 같다.

역시 이 대목에서 안타까운 건, 그들이 주고받은 자세한 싸움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고로 이런게 재밌는 법인데....

벗뜨~~~~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잊을 수 없는 결정적 한마디씩이 있었다는 것.

결국 어찌 보면 그 말도 안되는 싸움은 그 닥종이녀가 그 자리에 '버릇없게' 앉은 게 '얄미웠다'는 것에서 비롯되었지 않은가?

아마도, 다들 앉고는 싶었으나 앉기 애매한 그 자리-나중에 그 앞에 서 있었던 그 할아버지가 내리면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야지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 사람들이-그 틈을 비집고 쏘~옥 앉아버린 그녀에 대한 소심한 분노를, 어른에게 '버릇없게 했다'는 것으로 명분을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암튼 그 닥종이녀는 한참 말싸움 끝에,최종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그 결정적 한마디를 꺼냈더랬다.

"그리고 나 이 자리에 앉아도 되거든요? 나 장애인증 있거든요?"

이러는 것이었다.

장애인이라고라고라고라??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그녀가 어째서 장애인증이 있는지는 국정원에 의뢰해 봐야 알 수 있을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장애인증(아마도 4급이었던 것 같음)을 실제로 가방에서 꺼내서 자신만만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막상막하 용호상박의 싸움으로 줄타기를 해오던 그 둘 사이에서 그 한마디로 균형추가 깨지면서 그때까지의 평형이 급격히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제일 조마조마했더랬지 아마?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편들어 주는 쪽이 있게 마련인데 (물론 말도 안되는 싸움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민폐인지라 둘 다 짜증나는 대상인 법이지만) 심뽀 못된 난 아무래도 얄미움을 유발하는 닥종이녀 대신,왠지 그 얄미움을 쥐어박아 주는 듯한 무식한 아저씨 편을 들고 있었던가 보다. 뭐 그래봤자 둘이 누가 더 나을 것도 없었지만...

 

금세 수세에 몰린 아저씨가 어떻게 나올까 나름 심장 쫄깃했던 것도 잠시,

그 아저씨는 잠시 멈칫하더니,궁색하지만 아주 임팩트 있는 한 마디를, 그렇지만 자신 없게 던지는 것이었다.

" 이,이년아...그렇게 치면 나도 장애인이야 이년아,

  나도 손목이 안돌아가~" 이렇게 말끝을 흐리면서

실제로도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목을 부자연스럽게 돌리는 동작을 했다.

음하하하하하하하하~~~~아저씨 재미포인트 30점 정도 쌓으셨어요~~~

 

여튼 이후로도,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도 지기 싫었던 두 사람은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는 전철에서 사람들은 하나 둘 내리고, 공교롭게도 앉아 있는 그 닥종이녀 옆자리도 비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제일 가깝게 서 있던 나는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서 있는 사람은 닥종이녀와 열심히 싸우고 계신 그 아저씨가 유일했고,뭐 굳이 그 자리에 앉지 않아도 될 만큼 한 두 군데 자리가 있었지만,난 그 흥미진진한 싸움의 결말이 어찌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제일 관전하기 좋은 그 자리에 앉았었던 것 같다.

거기다가,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쓸데없는 의협심 내지는 공명심 같은 게 있었더랬다.

적당한 즈음에 내가 반드시 끼어들어 그 싸움을 말려보리라, 그리고 장렬히 전사하리라...이런 비슷한 마음이 있었지 뭐냐.

결국 나는 그녀 옆에서 싸움에 끼어들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둘의 대화가 빈 짧은 그 순간을 포착하여 한 마디를 비장하게 날렸다.

" 이제 그만들 하세요. 너무들 하시네요. 아가씨도 이제 진정하세요"

뭐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나름 난, 마치 드라마의 퐈려한 주인공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며,애써 얻은 대사 한 마디를 수만 번 외우고 시연해 보다가 실전에서 두근거리며 어색하게 연기하는 단역처럼 그 소중한 대사 한 마디를 나름 용기 내어 외쳤던 것이다.

 

그 렇 다 면 말 이 지 !!

이것들이 그 말에 조금이라도 반응해 주는게 최소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지들도 싸움하면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속으로는 끝내고 싶을 싸움을 말려 주는 사람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그들은 내 말에는 0.0000001%의 미동도 없이 여전히 최선을 다해 성실히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단 말이지!!!

이런 이런 또 제길제길제길제길.....ㅠㅠ

순식간에 그들은 아무 상관없던 나를 무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내가 왜 끼어들었을까 후회가 쓰나미로 밀려왔지만 뭐 어째. 별일 아니지뭐~

그렇지만 결국 난 돌돌 말아 가방에 넣어두었던 엠피쓰리를 꺼내 대수롭지 않은 척 쿨한 척 이어폰을 귀에 꼽고 지그시 눈을 감고 집에까지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음....이야기를 쓰고 나서 보면 결론은 항상 난 뭔가 항상 어리버리 허접스럽게 되는게 뭔가 찜찜하긴 하지만,

어쨌건 지하철 에피소드 1편은 이렇게 끝이다.